東夷
高麗傳
고려전
高麗之先, 出自夫餘.
고려高麗의 선조는 부여夫餘로부터 나왔다.
夫餘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為日光隨而照之, 感而遂孕, 生一大卵, 有一男子破殼而出, 名曰硃蒙.
부여왕夫餘王이 일찍이 하백河伯의 딸을 얻었고, 이로 인하여 궁실宮室 내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와 하백河伯의 딸을 비추었더니 이에 감화되어 마침내 아이를 배었고,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서 나왔더니 이름을 주몽硃蒙이라고 하였다.
夫餘之臣以硃蒙非人所生, 鹹請殺之, 王不聽.
부여夫餘의 신하들은 주몽硃蒙이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모두 주몽硃蒙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왕王은 듣지 않았다.
及壯, 因從獵, 所獲居多, 又請殺之.
성장하여 사냥을 따라갔는데, 많은 짐승을 잡았던 까닭에 다시 주몽硃蒙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其母以告硃蒙, 硃蒙棄夫餘東南走.
이를 어머니가 주몽硃蒙에게 알렸더니, 주몽硃蒙은 부여夫餘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遇一大水, 深不可越.
주몽硃蒙이 큰 물을 만났더니, 깊어서 지날 수가 없었다.
硃蒙曰:“我是河伯外孫, 日之子也. 今有難, 而追兵且及, 如何得渡?” 於是魚鱉積而成橋, 硃蒙遂渡, 追騎不得濟而還.
주몽硃蒙이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외손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지금 어려움을 만났더니, 병사들이 추적하여 여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건널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쌓여서 다리를 만들었더니 주몽硃蒙이 마침내 건널 수 있었고, 뒤를 쫓던 기병들이 건널 수 없어서 돌아갔다.
硃蒙建國, 自號高句麗, 以高爲氏.
주몽硃蒙이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고, 이에 고高를 씨氏로 삼았다.
硃蒙死, 子閭達嗣.
주몽硃蒙이 죽었더니 아들 여달閭達이 후사를 이었다.
至其孫莫來興兵, 遂並夫餘.
주몽硃蒙의 손자 막래莫來에 이르렀더니 병사를 일으켰고, 마침내 부여夫餘를 병합하였다.
至裔孫位宮, 以魏正始中入寇西安平, 毌丘儉拒破之.
후손 위궁位宮에 이르렀는데, 위魏 정시正始 연간에 서안평西安平을 침략하였는데, 관구검毌丘儉이 이를 막았다.
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 為慕容氏所破, 遂入丸都, 焚其宮室, 大掠而還.
위궁位宮의 현손의 아들은 소열제昭列帝라고 하였는데,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파를 당하였고, 마침내 환도丸都에 들어갔고, 궁실宮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 한 후에 돌아갔다.
昭列帝後為百濟所殺.
소열제昭列帝는 후에 백제百濟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其曾孫璉, 遣使後魏.
소열제昭列帝의 증손 련璉은 후위後魏에 사신을 보냈다.
璉六世孫湯, 在周遣使朝貢, 武帝拜湯上開府·遼東郡公·遼東王.
련璉의 6세손 탕湯은 주周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였더니, 무제武帝가 탕湯에게 상개부上開府·요동군공遼東郡公·요동왕遼東王의 벼슬을 내렸다.
高祖受禪, 湯複遣使詣闕, 進授大將軍, 改封高麗王.
고조高祖가 선양을 받았더니, 탕湯이 다시 사신을 보내서 궐闕에 이르렀더니, 대장군大將軍으로 진급하여 수여하였고, 봉작封爵을 고려왕高麗王으로 고쳤다.
歲遣使朝貢不絕.
해마다 신을 보내서 조공함이 끊이질 않았다.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그 나라의 동서는 2,000리이고, 남북은 1,000여리이다.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裏, 隨山屈曲, 南臨浿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는데, 역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하였고, 동서가 6이리이고, 산을 따라 굽어 있고, 남쪽은 패수浿水에 접하였다.
複有國內城·漢城, 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為“三京”.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신라新羅와 매번 서로 침입하고 약탈하였더니,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官有太大兄, 次大兄, 次小兄, 次對盧, 次意侯奢, 次烏拙, 次太大使者, 次大使者, 次小使者, 次褥奢, 次翳屬, 次仙人, 凡十二等. 複有內評、外評、五部褥薩. 人皆皮冠, 使人加插鳥羽. 貴者冠用紫羅, 飾以金銀. 服大袖衫, 大口?, 素皮帶, 黃革屨. 婦人裙襦加?. 兵器與中國略同. 每春秋校獵, 王親臨之.
人稅布五匹, 穀五石.
인세는 베가 다섯 필이고, 곡식은 다섯 석이다.
遊人則三年一稅, 十人共細布一匹, 租戶一石, 次七鬥, 下五鬥.
유인遊人은 3년에 1번을 내되 10명이 함께 삼베 1필을 내고, 벼는 호戶당 한 석을 내며, 다음은 일곱 두, 마지막은 다섯 두를 낸다.
反逆者縛之於柱, 爇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用刑既峻, 罕有犯者. 樂有五弦、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每年初, 聚戲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為二部, 以水石相濺擲, 喧呼馳逐, 再三而止. 俗好蹲踞. 潔淨自喜, 以趨走為敬, 拜則曳一腳, 立各反拱, 行必搖手. 性多詭伏. 父子同川而浴, 共室而寢. 婦人淫奔, 俗多遊女. 有婚嫁者, 取男女相悅, 然即為之, 男家送豬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敬鬼神, 多淫祠.
開皇初, 頻有使入朝.
개황開皇 초년에 사신의 입조가 빈번히 있었다.
及平陳之後, 湯大懼, 治兵積穀, 為守拒之策.
진陳을 평정한 이후, 고탕高湯이 크게 두려워하였더니 군대를 훈련하고 곡식을 쌓아두고는 우리들을 막을 책략을 내었다.
十七年, 上賜湯璽書曰: 朕受天命, 愛育率土, 委王海隅, 宣揚朝化, 欲使圓首方足, 各遂其心. 王每遣使人, 歲常朝貢, 雖稱籓附, 誠節未盡. 王既人臣, 須同朕德, 而乃驅逼靺鞨, 固禁契丹. 諸籓頓顙, 為我臣妾, 忿善人之慕義, 何毒害之情深乎?太府工人, 其數不少, 王必須之, 自可聞奏. 昔年潛行財貨, 利動小人, 私將弩手, 逃竄下國. 豈非修理兵器, 意欲不臧, 恐有外聞, 故為盜竊?時命使者, 撫尉王籓, 本欲問彼人情, 教彼政術. 王乃坐之空館, 嚴加防守, 使其閉目塞耳, 永無聞見. 有何陰惡, 弗欲人知, 禁制官司, 畏其訪察?又數遣馬騎, 殺害邊人, 屢馳奸謀, 動作邪說, 心在不賓. 朕於蒼生, 悉如赤子, 賜王土宇, 授王官爵, 深恩殊澤, 彰著遐邇. 王專懷不信, 恆自猜疑, 常遣使人, 密覘消息, 純臣之義, 豈若是也?蓋當由朕訓導不明, 王之愆違, 一已寬恕, 今日以後, 必須改革. 守籓臣之節, 奉朝正之典, 自化爾籓, 勿忤他國, 則長享富貴, 實稱朕心. 彼之一方, 雖地狹人少, 然普天之下, 皆為朕臣.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灑心易行, 率由憲章, 即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彥也?昔帝王作法, 仁信為先, 有善必賞, 有惡必罰, 四海之內, 具聞朕旨. 王若無罪, 朕忽加兵, 自餘籓國, 謂朕何也!王必虛心, 納朕此意, 慎勿疑惑, 更懷異圖. 往者陳叔寶代在江陰, 殘害人庶, 驚動我烽候, 抄掠我邊境. 朕前後誡敕, 經歷十年, 彼則恃長江之外, 聚一隅之眾, 昏狂驕傲, 不從朕言. 故命將出師, 除彼凶逆, 來往不盈旬月, 兵騎不過數千, 歷代逋寇, 一朝清蕩, 遐邇乂安, 人神胥悅. 聞王嘆恨, 獨致悲傷, 黜陟幽明, 有司是職, 罪王不為陳滅, 賞王不為陳存, 樂禍好亂, 何為爾也?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高麗之人, 多少陳國?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殷勤曉示, 許王自新耳. 宜得朕懷, 自求多福. 湯得書惶恐, 將奉表陳謝, 會病卒. 子元嗣立. 高祖使使拜元為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元奉表謝恩, 並賀祥瑞, 因請封王. 高祖優冊元為王. 明年, 元率靺鞨之眾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沖擊走之. 高祖聞而大怒, 命漢王諒為元帥, 總水陸討之, 下詔黜其爵位. 時饋運不繼, 六軍乏食, 師出臨渝關, 複遇疾疫, 王師不振. 及次遼水, 元亦惶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元”雲雲. 上於是罷兵, 待之如初, 元亦歲遣朝貢. 煬帝嗣位, 天下全盛, 高昌王、突厥啟人可汗並親詣闕貢獻, 於是征元入朝. 元懼籓禮頗闕. 大業七年, 帝將討元之罪, 車駕渡遼水, 上營於遼東城, 分道出師, 各頓兵於其城下. 高麗率兵出拒, 戰多不利, 於是皆嬰城固守. 帝令諸軍攻之, 又敕諸將:“高麗若降者, 即宜撫納, 不得縱兵.”城將陷, 賊輒言請降, 諸將奉旨不敢赴機, 先令馳奏. 比報至, 賊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者再三, 帝不悟. 由是食盡師老, 轉輸不繼, 諸軍多敗績, 於是班師. 是行也, 唯於遼水西拔賊武厲邏, 置遼東郡及通定鎮而還. 九年, 帝複親征之, 乃敕諸軍以便宜從事. 諸將分道攻城, 賊勢日蹙. 會楊玄感作亂, 反書至, 帝大懼, 即日六軍並還. 兵部侍郎斛斯政亡入高麗, 高麗具知事實, 悉銳來追, 殿軍多敗. 十年, 又發天下兵, 會盜賊蜂起, 人多流亡, 所在阻絕, 軍多失期. 至遼水, 高麗亦困弊, 遣使乞降, 囚送斛斯政以贖罪. 帝許之, 頓於懷遠鎮, 受其降款. 仍以俘囚軍實歸. 至京師, 以高麗使者親告於太廟, 因拘留之. 仍征元入朝, 元竟不至. 帝敕諸軍嚴裝, 更圖後舉, 會天下大亂, 遂不克複行.
百濟專
백제전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백제(百濟)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으로부터 나왔다.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雲:“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王舍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為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為東夷強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為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其國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南接新羅, 北拒高麗.
백제百濟는 동서로 450리, 남북으로는 900리였고, 남쪽으로는 신라新羅와 접하였고, 북쪽으로는 고려高麗가 막고 있다.
其都曰居拔城.
백제百濟의 도성都城은 거발성居拔城이라고 한다.
官有十六品: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杆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次施德, 皁帶;次固德, 赤帶;次李德, 青帶;次對德以下, 皆黃帶;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克虞, 皆用白帶. 其冠制並同, 唯奈率以上飾以銀花.
관직은 모두 16개의 품계가 있다. 첫째는 좌평左平이고, 다음은 대솔大率, 다음은 은솔恩率, 다음은 덕솔德率, 다음은 간솔杆率, 다음은 내솔奈率, 다음은 장덕將德이고, 모두 자색의 허리띠를 사용한다. 다음은 시덕施德이고, 흑색의 허리띠이다. 다음은 고덕固德이고, 적색의 허리띠이다. 다음은 계덕季德이고, 청색의 허리띠이다. 다음은 대덕對德이고, 이하로는 모두 황색의 허리띠이다. 다음은 문독文督이고, 다음은 무독武督이고, 다음은 좌군佐軍이고, 다음은 진무振武이고, 다음은 극우克虞이고, 모두 백색의 허리띠를 사용한다. 관제冠制는 모두 동일하고, 오직 나솔奈率 이상만 은색의 꽃으로 장식하였다.
長史三年一交代. 畿內為五部, 部有五巷, 士人倨焉. 五方各有方領一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백제百濟에는 신라新羅·고려高麗·왜倭의 사람 등이 섞여 있고, 중국中國 사람도 있다.
其衣服與高麗略同. 婦人不加粉黛, 女辮發垂後, 已出嫁則分為兩道, 盤於頭上. 俗尚騎射, 讀書史, 能吏事, 亦知醫藥、蓍龜、占相之術. 以兩手據地為敬. 有僧尼, 多寺塔. 有鼓角、箜篌、箏、竽、{?虎}、笛之樂, 投壺、圍棋、樗蒲、握槊、弄珠之戲. 行宋《元嘉歷》, 以建寅月為歲首.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刀氏、解氏、貞氏、國氏、木氏、苗氏. 婚娶之禮, 略同於華. 喪制如高麗. 有五穀、牛、豬、雞, 多不火食. 厥田下濕, 人皆山居. 有巨栗.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매번 사중삭四仲朔의 달에 왕王은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平陳之歲, 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 其船得還, 經於百濟, 昌資送之甚厚, 並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百濟王既聞平陳, 遠令奉表, 往複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跡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相體悉.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使者舞蹈而去.
高祖善之, 下詔曰:“百濟王既聞平陳, 遠令奉表, 往複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跡淳至, 朕已委知. 서로가 떨어져 있는 것이 비록 멀다고 할지라도, 사정이야 얼굴을 맞대는 것처럼 알고 있으니, 어찌 반드시 수차례 사신이 오고가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매년마다 별도로 입조하여 조공할 필요가 없고, 짐 또한 사신을 보내서 가게 하지 않을 것이니 왕王「=부여장夫餘璋/백제百濟의 무왕武王」은 마땅히 이를 알지어다.”라고 하였더니 사신은 춤을 추면서 돌아갔다.
開皇十八年, 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 屬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為軍導.
帝下詔曰:“往歲為高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恐懼,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제帝가 조서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이전에 고려高麗는 조공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신하의 예가 없었던 까닭에 장군將軍에게 명을 내려서 토벌하게 하였다. 고원高元「고구려의 영양왕」과 신하들은 몹시 두려워하여 복종하며 죄를 시인하였기에 짐이 이미 그들을 용서하였으므로 정벌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며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高麗頗知其事, 以兵侵掠其境. 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 大業三年, 璋遣使者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者王孝鄰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令覘高麗動靜.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七年, 帝親征高麗, 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
7년 「611년」 제帝「양제煬帝」가 친히 고려高麗를 정벌하고자 하였더니 장璋「부여장扶餘璋」이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보내와서 군대를 보내는 시기를 물었다.
帝大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郎席律詣百濟, 與相知.
제帝「양제煬帝」가 크게 기뻐하며 후대하고 상을 더하여 주었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郎 석율席律을 보내서 백제百濟에 가게 하여서 (군대를 보내는 시기를) 서로 알고 있게 하였다.
明年, 六軍渡遼, 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
명년「611년」에 6군이 요하遼河를 건넜더니 장璋<부여장扶餘璋>은 경계에 있는 병사들에게 철저히 지키게 하였고, 양제煬帝<양광楊光>의 군대를 돕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하였으나 실제로는 양면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尋與新羅有隙, 每相戰爭. 十年, 複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絕. 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南北千餘裏, 東西數百裏, 土多?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雲.
新羅傳
신라전
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신라국新羅國은 고려高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漢의 시기에 낙랑樂浪의 땅이었고, 혹은 사라국斯羅國으로 칭한다.
魏將毌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위魏<조위曹魏>의 장군將軍 관구검毌丘儉이 고려高麗를 토벌하였더니, 고려高麗는 파괴를 당하고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其後複歸故國, 留者遂為新羅焉.
(고려高麗는) 후에 옛나라로 돌아왔는데, (옥저沃沮에) 남은 사람들은 결국 신라新羅가 되었다.
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보위寶位를 전하여 김진평金眞平에 이르렀고, 개황開皇 14년(594년),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高祖拜眞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고조高祖가 진평眞平<김진평金眞平>에게 상개부上開府·낙랑군공樂浪郡公·신라왕新羅王의 벼슬을 주었다.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強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
진평眞平<김진평金眞平>의 선조는 백제百濟에 부용하였는데, 후에 백제百濟가 고려高麗를 정벌하고자 하였던 까닭에 고려 高麗의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감당하지 못하였더니, 연이어 신라新羅로 귀화하였더니 마침내 강성해졌고, 이로 인하여 백제百濟를 습격하였고, 가라국迦羅國이 부용국이 되었다.
其官有十七等:其一曰伊罰幹, 貴如相國;次伊尺幹, 次迎幹, 次破彌幹, 次大阿尺幹, 次阿尺幹, 次乙吉幹, 次沙咄幹, 次及伏幹, 次大奈摩幹,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土,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戍、邏俱有屯管部伍.
風俗、刑政、衣服, 略與高麗、百濟同.
풍속 형벌 의복은 대략 고려 백제와 같다.
每正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群官. 其日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 其有大事, 則聚群官詳議而定之. 服色尚素. 婦人辮發繞頭, 以雜彩及珠為飾. 婚嫁之禮, 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婚之夕, 女先拜舅姑, 次即拜夫. 死有棺斂, 葬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持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產, 略與華同.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
靺鞨傳
말갈전
靺鞨, 在高麗之北, 邑落俱有酋長, 不相總一.
말갈靺鞨은 고려高麗의 북쪽에 있고, 읍락邑落에는 모두 추장酋長이 있지만, 서로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凡有七種:其一號粟末部,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 其二曰伯咄部, 在粟末之北, 勝兵七千. 其三曰安車骨部, 在伯咄東北. 其四曰拂涅部, 在伯咄東. 其五曰號室部, 在拂涅東. 其六曰黑水部, 在安車骨西北. 其七曰白山部, 在粟末東南.
모두 일곱 종족이 있다: 첫째, 속말부(粟末部)로 고려(高麗)와 접하고 있고, 강한 군사는 수천이고, 모두 사납고 날쌔며, 매번 고려(高麗)를 약탈한다. 둘째, 백돌부(伯咄部)로 속말(粟末)의 북쪽에 있고, 강한 군사가 7천이다. 셋째, 안거골부(安車骨部)로 백돌(伯咄)의 동북쪽에 있다. 넷째, 불열부(拂涅部)로 백돌(伯咄)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 실부(室部)로 불열(拂涅)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 흑수부(黑水部)로 안거골(安車骨)의 북서쪽에 있다. 일곱째, 백산부(白山部)로 속말(粟末)의 동남쪽에 있다.
勝兵並不過三千, 而黑水部尤為勁健.
강한 군사는 모두 3천을 넘지는 않으나, 흑수부(黑水部)가 특별히 굳세고 튼튼하다.
自拂涅以東, 矢皆石鏃, 即古之肅慎氏也.
불열(拂涅)의 동쪽에서는 화살에 모두 돌화살촉을 사용하는데, 즉 옛날의 숙신씨(肅慎氏)이다.
所居多依山水, 渠帥曰大莫弗瞞咄, 東夷中為強國.
有徒太山者, 俗甚敬畏, 上有熊羆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 地卑濕, 築土如堤, 鑿穴以居, 開口向上, 以梯出入. 相與偶耕, 土多粟麥穄. 水氣鹹, 生鹽於木皮之上. 其畜多豬. 嚼米為酒, 飲之亦醉. 婦人服布, 男子衣豬狗皮. 俗以溺洗手面, 於諸夷最為不潔.
其俗淫而妒, 其妻外淫, 人有告其夫者, 夫輒殺妻, 殺而後悔, 必殺告者, 由是奸淫之事終不發揚. 人皆射獵為業, 角弓長三尺, 箭長尺有二寸. 常以七八月造毒藥, 傅矢以射禽獸, 中者立死.
開皇初, 相率遣使貢獻. 高祖詔其使曰:“朕聞彼土人庶多能勇捷, 今來相見, 實副朕懷. 朕視爾等如子, 爾等宜敬朕如父.”對曰:“臣等僻處一方, 道路悠遠, 聞內國有聖人, 故來朝拜. 既蒙勞賜, 親奉聖顏, 下情不勝歡喜, 願得長為奴仆也.”
其國西北與契丹相接, 每相劫掠. 後因其使來, 高祖誡之曰:“我憐念契丹與爾無異, 宜各守土境, 豈不安樂?何為輒相攻擊, 甚乖我意!”使者謝罪.
高祖因厚勞之, 令宴飲於前. 使者與其徒皆起舞, 其曲折多戰鬥之容. 上顧謂侍臣曰:“天地間乃有此物, 常作用兵意, 何其甚也!”
然其國與隋懸隔, 唯粟末、白山為近. 煬帝初與高麗戰, 頻敗其眾, 渠帥度地稽率其部來降. 拜為右光祿大夫, 居之柳城, 與邊人來往. 悅中國風俗, 請被冠帶, 帝嘉之, 賜以錦綺而褒寵之. 及遼東之役, 度地稽率其徒以從, 每有戰功, 賞賜優厚. 十三年, 從帝幸江都, 尋放歸柳城. 在途遇李密之亂, 密遣兵邀之, 前後十餘戰, 僅而得免. 至高陽, 複沒於王須拔. 未幾, 遁歸羅藝.
○流求國
流求國, 居海島之中, 當建安郡東, 水行五日而至. 土多山洞. 其王姓歡斯氏, 名渴剌兜, 不知其由來有國代數也. 彼土人呼之為可老羊, 妻曰多拔荼. 所居曰波羅檀洞, 塹柵三重, 環以流水, 樹棘為籓. 王所居舍, 其大一十六間, 雕刻禽獸. 多鬥鏤樹, 似橘而葉密, 條纖如發然下垂. 國有四五帥, 統諸洞, 洞有小王. 往往有村, 村有鳥了帥, 並以善戰者為之, 自相樹立, 理一村之事. 男女皆以白�寧繩纏發, 從項後般繞至額. 其男子用鳥羽為冠, 裝以珠貝, 飾以赤毛, 形制不同. 婦人以羅紋白布為帽, 其形正方. 織鬥鏤皮並雜色�寧及雜毛以為衣, 制裁不一. 綴毛垂螺為飾, 雜色相間, 下垂小貝, 其聲如佩, 綴?施釧, 懸珠於頸. 織藤為笠, 飾以毛羽. 有刀、槊、弓、箭、劍、鈹之屬. 其處少鐵, 刃皆薄小, 多以骨角輔助之. 編�寧為甲, 或用熊豹皮. 王乘木獸, 令左右輿之而行, 導從不過數十人. 小王乘機, 鏤為獸形. 國人好相攻擊, 人皆驍健善走, 難死而耐創. 諸洞各為部隊, 不相救助. 兩陣相當, 勇者三五人出前跳噪, 交言相罵, 因相擊射. 如其不勝, 一軍皆走, 遣人致謝, 即共和解. 收取鬥死者, 共聚而食之, 仍以髑髏將向王所. 王則賜之以冠, 使為隊帥. 無賦斂, 有事則均稅. 用刑亦無常准, 皆臨事科決. 犯罪皆斷於鳥了帥;不伏, 則上請於王, 王令臣下共議定之. 獄無枷鎖, 唯用繩縛. 決死刑以鐵錐, 大如箸, 長尺餘, 鑽頂而殺之. 輕罪用杖. 俗無文字, 望月虧盈以紀時節, 候草藥枯以為年歲. 人深目長鼻, 頗類於胡, 亦有小慧. 無君臣上下之節、拜伏之禮. 父子同床而寢. 男子拔去髭鬢, 身上有毛之處皆亦除去. 婦人以墨黥手, 為蟲蛇之文. 嫁娶以酒肴珠貝為娉, 或男女相悅, 便相匹偶. 婦人產乳, 必食子衣, 產後以火自炙, 令汗出, 五日便平複. 以木槽中暴海水為鹽, 木汁為酢, 釀米麥為酒, 其味甚薄. 食皆用手. 偶得異味, 先進尊者. 凡有宴會, 執酒者必待呼名而後飲. 上王酒者, 亦呼王名. 銜杯共飲, 頗同突厥. 歌呼蹋蹄, 一人唱, 從皆和, 音頗哀怨. 扶女子上膊, 搖手而舞. 其死者氣將絕, 舉至庭, 親賓哭泣相吊. 浴其屍, 以布帛纏之, 裹以葦草, 親土而殯, 上不起墳. 子為父者, 數月不食肉. 南境風俗少異, 人有死者, 邑裏共食之. 有熊羆豺狼, 尤多豬雞, 無牛羊驢馬. 厥田良沃, 先以火燒而引水灌之. 持一插, 以石為刃, 長尺餘, 闊數寸, 而墾之. 土宜稻、梁、沄、黍、麻、豆、赤豆、胡豆、黑豆等, 木有楓、栝、樟、松、楩、楠、杉、梓、竹、藤、果、藥, 同於江表, 風土氣候與嶺南相類. 俗事山海之神, 祭以酒肴, 鬥戰殺人, 便將所殺人祭其神. 或依茂樹起小屋, 或懸髑髏於樹上, 以箭射之, 或累石系幡以為神主. 王之所居, 壁下多聚髑髏以為佳. 人間門戶上必安獸頭骨角. 大業元年, 海師何蠻等, 每春秋二時, 天清風靜, 東望依希, 似有煙霧之氣, 亦不知幾千裏. 三年, 煬帝令羽騎尉硃寬入海求訪異俗, 何蠻言之, 遂與蠻俱往, 因到流求國. 言不相通, 掠一人而返. 明年, 帝複令寬慰撫之, 流求不從, 寬取其布甲而還. 時倭國使來朝, 見之曰:“此夷邪久國人所用也.”帝遣武賁郎將陳棱、朝請大夫張鎮州率兵自義安浮海擊之. 至高華嶼, 又東行二日至郤鼊嶼, 又一日便至流求. 初, 棱將南方諸國人從軍, 有昆侖人頗解其語, 遣人慰諭之, 流求不從, 拒逆官軍. 棱擊走之, 進至其都, 頻戰皆敗, 焚其宮室, 虜其男女數千人, 載軍實而還. 自爾遂絕.
○倭國
倭國, 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裏, 於大海之中依山島而居. 魏時譯通中國. 三十餘國, 皆自稱王. 夷人不知裏數, 但計以日. 其國境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其地勢東高西下. 都於邪靡堆, 則《魏志》所謂邪馬台者也.雲去樂浪郡境及帶方郡並一萬二千裏, 在會稽之東, 與儋耳相近. 漢光武時, 遣使入朝, 自稱大夫. 安帝時, 又遣使朝貢, 謂之倭奴國. 桓、靈之間, 其國大亂, 遞相攻伐, 歷年無主. 有女子名卑彌呼, 能以鬼道惑眾, 於是國人共立為王. 有男弟, 佐卑彌理國. 其王有侍婢千人, 罕有見其面者, 唯有男子二人給王飲食, 通傳言語. 其王有宮室樓觀, 城柵皆持兵守衛, 為法甚嚴. 自魏至於齊、梁, 代與中國相通. 開皇二十年, 倭王姓阿每, 字多利思北孤, 號阿輩雞彌, 遣使詣闕. 上令所司訪其風俗. 使者言倭王以天為兄, 以日為弟, 天未明時出聽政, 跏趺坐, 日出便停理務, 雲委我弟. 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 王妻號雞彌, 後宮有女六七百人. 名太子為利歌彌多弗利. 無城郭. 內官有十二等:一曰大德, 次小德, 次大仁, 次小仁, 次大義, 次小義, 次大禮, 次小禮, 次大智, 次小智, 次大信, 次小信, 員無定數. 有軍尼一百二十人, 猶中國牧宰. 八十戶置一伊尼翼, 如今裏長也. 十伊尼翼屬一軍尼. 其服飾, 男子衣裙襦, 其袖微小, 履如屨形, 漆其上, 系之於腳. 人庶多跣足. 不得用金銀為飾. 故時衣橫幅, 結束相連而無縫. 頭亦無冠, 但垂發於兩耳上. 至隋, 其王始制冠, 以錦彩為之, 以金銀鏤花為飾. 婦人束發於後, 亦衣裙襦, 裳皆有?. ?竹為梳, 編草為薦, 雜皮為表, 緣以文皮. 有弓、矢、刀、槊、弩、、斧, 漆皮為甲, 骨為矢鏑. 雖有兵, 無征戰. 其王朝會, 必陳設儀仗, 奏其國樂. 戶可十萬. 其俗殺人強盜及奸皆死, 盜者計贓酬物, 無財者沒身為奴. 自餘輕重, 或流或杖. 每訊究獄訟, 不承引者, 以木壓膝, 或張強弓, 以弦鋸其項. 或置小石於沸湯中, 令所競者探之, 雲理曲者即手爛. 或置蛇甕中, 令取之, 雲曲者即螫手矣. 人頗恬靜, 罕爭訟, 少盜賊. 樂有五弦、琴、笛. 男女多黥臂點面文身,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蔔筮, 尤信巫覡. 每至正月一日, 必射戲飲酒, 其餘節略與華同. 好棋博、握槊、樗蒲之戲. 氣候溫暖, 草木冬青, 土地膏腴, 水多陸少. 以小環掛鷺�項, 令入水捕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解葉, 食用手哺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即為婚. 婦入夫家, 必先跨犬,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妒. 死者斂以棺郭, 親賓就屍歌舞, 妻子兄弟以白布制服. 貴人三年殯於外, 庶人蔔日而瘞. 及葬, 置屍船上, 陸地牽之, 或以小輿. 有阿蘇山, 其石無故火起接天者, 俗以為異, 因行禱祭. 有如意寶珠, 其色青, 大如雞卵, 夜則有光, 雲魚眼精也.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 多珍物, 並敬仰之, 恆通使往來. 大業三年, 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 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至書日沒處天子無恙”雲雲.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 勿複以聞.”明年, 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羅國, 經都斯麻國, 乃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為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以東, 皆附庸於倭. 倭王遣小德阿輩台, 從數百人, 設儀仗, 鳴鼓角來迎. 後十日, 又遣大禮, 哥多毗, 從二百餘騎郊勞. 既至彼都, 其王與清相見, 大悅, 曰:“我聞海西有大隋, 禮義之國, 故遣朝貢. 我夷人僻在海隅, 不聞禮義, 是以稽留境內, 不即相見. 今故清道飾館, 以待大使, 冀聞大國惟新之化.”清答曰:“皇帝德並二儀, 澤流四海, 以王慕化, 故遣行人來此宣諭.”既而引清就館. 其後清遣人謂其王曰:“朝命既達, 請即戒途.”於是設宴享以遣清, 複令使者隨清來貢方物. 此後遂絕. 史臣曰:廣穀大川異制, 人生其間異俗, 嗜欲不同, 言語不通, 聖人因時設教, 所以達其志而通其俗也. 九夷所居, 與中夏懸隔, 然天性柔順, 無獷暴之風, 雖綿邈山海, 而易以道禦. 夏、殷之代, 時或來王. 暨箕子避地朝鮮, 始有八條之禁, 疏而不漏, 簡而可久, 化之所感, 千載不絕. 今遼東諸國, 或衣服參冠冕之容, 或飲食有俎豆之器, 好尚經術, 愛樂文史, 遊學於京都者, 往來繼路, 或亡沒不歸. 非先哲之遺風, 其孰能致於斯也?故孔子曰:“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行矣.”誠哉斯言. 其俗之可采者, 豈徒楛矢之貢而已乎?自高祖撫有周餘, 惠此中國, 開皇之末, 方事遼左, 天時不利, 師遂無功. 二代承基, 志包宇宙, 頻踐三韓之域, 屢發千鈞之弩. 小國懼亡, 敢同困獸, 兵連不戢, 四海騷然, 遂以土崩, 喪身滅國. 兵志有之曰:“務廣德者昌, 務廣地者亡.”然遼東之地, 不列於郡縣久矣. 諸國朝正奉貢, 無闕於歲時, 二代震而矜之, 以為人莫若己, 不能懷以文德, 遽動幹戈. 內恃富強, 外思廣地, 以驕取怨, 以怒興師. 若此而不亡, 自古未之聞也. 然則四夷之戒, 安可不深念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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